'제주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9.29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사진가 김영갑씨를 기억하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사진가 김영갑씨를 기억하다.

2004.01.27 1판 1쇄 발행.
  하지만 이 책의 전반부는 그보다 훨씬 전인 1997년에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라는 책의 일부를 발췌해 실었고,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병마와 싸우게 된 이야기, 그리고 그 이 책이 나올 당시에도 계속 앓고 있으면서 어떻게 사진과 대면했는가 하는 것을 사뭇 담담하고 절제된 필체가 후반부를 이루고 있다. 처음엔 몰랐는데 도서관에서 두 권의 책을 접수한 뒤 글씨가 좀 크고 깔끔한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어머니께 빌려드리고 내 책을 먼저 반납한 다음 잊고 있다가 돌려드리는 과정에서 낯익은 내용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반 부분은 내가 본 내용이 아니라서 학교오는 길에 완전히 심취해 읽었다.

  솔직히 김영갑이라는 사진작가에 대해 알고있는 게 없었고, 여름방학 끝무렵에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의 존재에 대해 강렬하게 각인하게 되었다. 무식한 티를 철철 내면서 부모님 따라 찾아간 고 김영갑씨의 갤러리 '두모악'. 김영갑씨의 생전 거처이자 전시관었던 두모악은 1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제주도와 교감하고 부대끼면서 살아 온 한 예술가의 고단함과 역경은 보이지 않고 단아하고 정갈한 인테리어와 작업실, 마당과 구멍 송송난 현무암 돌담들에 소박했던 김영갑씨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있는 듯 했다. 전시된 사진을 찍은 사진기는 대부분 파노라마 카메라. 그는 일반 3x5나 중형 사이즈로 찍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시원하고 신비롭고 이국적인 풍경을 필름에 길게길게 담았다. 제주도에 사진 찍으러 간다는 사람들이 많고, 갈 때마다 큼지막한 장비들을 하나둘씩 메고 가지만, 제주도의 센 바람을 오랫동안 온 반 토박이 아저씨의 소형카메라보다 보는 눈이 없어 허탕만 치고 돌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결과물도 비할바가 못된다. 일회성의 눈요기에만 좋은 육지인들의 사진과는 달리 김영갑씨의 사진은 어쩐지 셔터가 느린듯 하면서도, 약간은 뭉개진듯 하면서도 자꾸 눈이 가는 그림과 같다. 제주도에서 있던 마지막 날, 그와 그의 작업장과 그의 사진에 반하다.
  사진은 한순간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마다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과도 같다. 요즘들어 기분이 뒤죽박죽이다가도 카메라를 잡고 그 작은 뷰파인더 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신중히 누르다보면 잠시나마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어서 좋다. 그게 카메라를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다보면 빛을 따라가게 된다. 추하게 보이는 것도 빛 때문에 변해서 조그마한 필름면에 아름다운 것으로 와 박힌다. 그게 카메라를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내가 카메라만 지니고 골목을, 들판을, 강가를 돌아다니면서 지내는 동안에는 외로움도 그리움도 시선 너머에 가려둘 수 있다. 그게 또한 카메라를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미로만 삼아 왔던 카메라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사회로 몰아넣는 와중에도 말없이 붙잡아 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녀석으로 남아 있다.

  사진을 찍는 외로운 이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김영갑씨도 나와 아마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부모 형제 친구를 떠나 섬에 살면서 그렇다고 해서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박한 대접을 받아야 했던 그가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카메라를 놓았다면, 그의 마음에 해답을 준 자연을 손수 담지 못했다면 외람된 말이지만 그의 성격에 아마도 루게릭 병을 진단받기 전에 이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없이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면 외로움과 궁핍함은 감수해야 한다. 외로움과 궁핍함을 즐기려면 무언가 소일거리가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일거리가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간장, 된장, 고추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하루가 상큼하다. 몸만 움직이면 자연 속에 먹을거리는 무진장이다. 굶주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한 돈 걱정은 없다. 문제는 소일거리다. 365일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소일거리만 있으면 된다.제주도의 속살을 엿보겠다고 동서남북 10년 세월을 떠돌았다. 그러고 나니 제주도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바라보는 해돋이와 해넘이가 아름다운지, 제주 바다는 어느 때에야 감추었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나름대로 최상의 방법들을 찾아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숲보다는 나무로, 나무보다는 가지로 호기심이 변해갔다. 계절에 따라 기상의 변화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풍경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그 진면목을 무어라 단정지을 수 없다. 아름다움의 핵심에 도달하는 황홀한 순간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최적의 장소에서 미리 준비하고 대기해야 한다. 그래야 삽시간의 황홀을 맞이할 수 있다. 결정적 순간을 만날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밤하늘 별자리처럼제주도 전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느 ㄴ대자연의 황홀한 순간을,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려면 스물 네 시간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으려면 삶이 단순해야 한다. 스물 네 시간 하나에 집중하고 몰입을 계속하려면 철저하게 외로워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하기 위해서는 최소의 경비로 하루를 견뎌야 한다. 부지런하고 검소하지 않으면 십년 세월을 견딜 수 없다. 십년 세월을 견딘다고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몸을 내던져 아낌없이 태워야만이 가능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행착오를 통해 마음의 눈은 떠진다. 진짜는 두 눈이 아닌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 심안은 간절히 원한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다. 앞뒤 재지 않고 육신을 내던져 간절히 소망할 때 마음의 눈은 열린다.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태풍이 부는 날ㅇ리나, 바람 한 줄기 없는 날에도,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똑같은 장소에 간다. 앉아서 보고, 서서 보고, 누워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슬플 때에도 기쁠 때에도, 혼자서 바라본다. 그렇게 몰입한 후에야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 한다. 제주만이 간직한 아름다움이 제모습을 드러낸다.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는 것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고 느낄 수 있는 심안이 없으면 그저 무심히 지나친다.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친 것들 속에 진짜배기는 숨겨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모르기에 마음 편안히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심안으로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고요해져선 혼자 지내야 한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젊음은 온갖 유혹에 흔들린다. 생각을 하나로 모으려면 잡념이 없어야 한다. 한 가지에 몰입해 있으면 몸도, 마음도 고단하지 않다. 배고픔도, 추위도, 불편함도, 외로움도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에 취해 있는 동안은 그저 행복할 뿐이다. 몰입해 있는 동안은 고단하고 각박한 삶도, 야단법석인 세상도 잊고 지낸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외로움과 사진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사진과 진지하게 정면으로 대면하려면 주변 사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김영갑이 그랬고, 나도 가끔.. 카메라를 넣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서 약간의 적응이 필요하지만.. 말없이 등을 대어 주는 까맣고 묵직한 이 녀석이 기특하다. 이것이 내가 카메라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의 삶과 그가 남긴 사진들을 잠시 추억하면서..제주도를 사랑한 사진가 김영갑씨를 기억하다.



 
prev 1 next